1985년, 그래픽 디자이너 안상수가 발표한 안상수체(혹은 안체)는 가장 대표적인 탈네모틀 글꼴이자, 가장 유명한 한글꼴 중 하나다. 이 글꼴이 그토록 유명해진 건 아마도 1991년 ‘아래한글’ 프로그램에 기본 서체로 탑재되었다는 데에 부분적 이유가 있겠지만, 더욱 근본적인 이유는 따로 있다. 도대체가 생전 처음 보는 모양의 글꼴이었기 때문이다. 바탕체와 고딕체에 익숙해진 사람들의 눈에 여기저기로 뾰족하게 돌출되고, 마치 오래된 안경마냥 동글동글한 안상수체의 인상은 그야말로 낯설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한번 자세히 뜯어보자. 안상수체의 가장 큰 특징은 초성, 중성, 받침의 모양과 크기가 어느 위치에 오든 모두 동일하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맑은고딕체로 ‘각’을 쓰면 초성 ‘ㄱ’과 종성 ‘ㄱ’의 크기과 모양이 달라지지만, 안상수체에서는 그 모양과 크기가 모두 같다. 받침이 중성의 정중앙에 온다는 점, 그중 쌍받침은 아예 오른쪽으로 비어져 나간다는 것 또한 안상수체의 극단적 형태미를 떠받쳐주는 요소다. 중요한 것은 이런 특징들이 안상수의 개인적 미감에 의한 것이 아닌, 한글의 창제 원리에 근거했다는 데에 있다.
훈민정음에는 “끝소리에는 첫소리를 다시 쓴다.”라고 밝히고 있거니와, 이는 “끝이 다시 시작이 되고 겨울이 다시 봄이 되는” 우주의 원리를 적용한 것이라 말한다. 안상수체에서 초성과 받침이 같은 모양과 크기인 것은 바로 이런 원칙에 기반한 것이다. 또 하나, “글자는 스물 여덟뿐이로되 엉킨 걸 헤쳐” 찾았다는 한글의 최소주의 원칙 또한 빼놓을 수 없는 안상수체의 원리다. 적게는 2,350자, 많게는 11,172자를 일일이 만들어야 하는 완성형 네모틀 글꼴에 비해 쌍받침까지 포함해 67자만 만들면 되는 세벌식 조합형인 안상수체야말로 방대한 한자를 대체하는 새로운 글자, 한글의 원래 모습에 가장 가까이 다가선 글꼴인 것이다. (물론 안상수체가 어느날 문득, 하늘에서 뚝 떨어진 건 아니다. 1976년 조영제, 1977년 김인철 그리고 1984년 이상철이 했던 한글 실험이 없었다면 안상수체는 지금과는 사뭇 다른 모습을 띄고 있었을지 모른다.) 말하자면 안상수체는 오래된 원칙에 근거해 가장 혁신적인 모양을 이룬 희귀한 사례인 셈이다.
이 불세출의 글꼴을 이루고 있는 건 오직 직선과 동그라미뿐이다. ‘획’이라고 말할 때 느껴지는 손글씨의 흔적은 그 어디에도 없다. 안상수체의 딱딱하고 동그란 자음과 모음들은 수학과 이성에 대한 상쾌한 신뢰를 접착제 삼아 하나의 글자를, 그리고 의미를 이룬다. 디자인 평론가 최범이 안상수를 일컬어 한 말, “우리 디자인계에서 정말 희소한 모더니스트”라는 표현은 이런 점에서 적절하다. (우리보다 훨씬 이른 시기에 모더니즘을 경험한 서구에도 이와 유사한 원리에 근거한 글꼴들이 있다. 파울 레너의 퓨추라(Futura), 허버트 바이어의 유니버설(Universal) 등은 ‘자’와 ‘컴퍼스’로 대표되는 이성에 대한 무한한 신뢰, 그리고 이를 통해 유토피아를 구축할 수 있다는 믿음이 만들어 낸 대표적 사례다.) 안상수체의 ‘모던’한 기하학적 특징은 그의 포스터 작업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한글 만다라’(1988), ‘문자도’(1996), ‘보고서/보고서’(2001) 등에서 안상수체의 자음과 모음들은 뜻을 전달하는 도구가 아닌 순수 조형요소로 기능한다. 이 포스터들에서 안상수체는 ‘읽는 글자'가 아닌 하나의 탁월한 ‘보는 글자'로서의 면모를 마음껏 자랑한다.
안상수체에 흔히 따라 붙는 가독성에 대한 논란 또한 이런 점에서 볼 때 부차적인 것에 불과하다. 본문용 서체로 적합하지 않다는 폄하 또한 마찬가지다. 안상수체의 원형태가 <과학동아>의 제호였고, 본격적으로 적용된 첫 사례가 ‘제3회 홍익시각디자이너협회 회원전’ 포스터였다는 사실처럼 이 글꼴은 태생적으로 제목, 혹은 포스터에 적합한 것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 글꼴이 본문용으로 적합하다면 그것이야말로 안상수체의 급진성과 어울리지 않는 것일지 모른다.
2007년, 디자이너 안상수는 구텐베르크상을 수상했다. 이 수상의 한가운데에 안상수체가 있었음은 물론이다. 상을 받는 자리에서 그는 ‘글자사람’ 세종대왕과 ‘활자사람’ 구텐베르크, 그리고 현대 타이포그라피의 문을 연 얀 치홀트를 거론했다. 세종대왕, 구텐베르크, 그리고 얀 치홀트. 안상수체는 이 세 명이 만나는 삼거리 교차로에 서 있다.
<매일의 디자인> 은 한국디자인문화재단과 함께합니다.
글 김형진
서울대학교 고고미술사학과와 동대학원에서 미술사를 전공했다. 번역한 책으로 [영혼을 잃지 않는 디자이너 되기](공역)가 있고, 격월간 디자인잡지 <디플러스>에 디자인 비평을 연재하고 있다. 현재 디자인 스튜디오 워크룸의 공동대표다.